[항공] 독일의 V-2 로켓

2012 포스팅 자료실 2012.03.25 20:02
**우주로켓의 실용화 - 독일의 V-2 로켓**


  고체연료 로켓을 '화전'이란 무기 형식으로 대량 생산하여 실용화시킨 것은 중국이었지만, 액체연료 로켓을 대량  생산하여 실용화 시킨 것은 독일이었습니다. V-2호 라는 로켓무기로 사용되었는데 전쟁 때문에 많은 경비를 무릅쓰고 서둘러 개발 생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액체연료 로켓인 V-2호는 고체연료 로켓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고도의 과학기술적인 산물로서, 실제적인 우주로켓의 원조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꿈을 이루는 버튼


V-2 호의 이모저모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독일이 개발한 V-2호(보복 2호 라는 뜻, 그 이전의 V-1 호는 간단한 제트엔진을 이용한 날개 달린 폭탄이었음)는 액체연료 로켓에 의한 비행폭탄이었는데, 1944년 9월 7일 도버해협 넘어 런던을 향해 발사하기 시작하여 1945년 3월 2일까지 모두 1,359발을 발사하여 런던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고, 기타 유럽 여러 도시를 향하여 2,000발 이상이 발사되었다고 합니다.

(독일이 처음으로 개발한 로켓 폭탄 V-2호. 지하공장에서 6,900대나 생산되었다고 한다. 대륙간 탄도미사일 ICBM의 원조)


 

전쟁이 끝난 후 아이젠하워 연합군 사령관이 "만일 V-2호가 6개월 정도만 먼저 나왔었더라면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만 봐도 당시 V-2호가 얼마나 무서운 무기였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V-1 호는 저공을 시속 550km 정도로 날았기 때문에 총에 맞아 상당수가 격추되어 별 효과가 없었지만, V-2호는 지상에서 수직으로 발사되어 타원궤도를 그리면서 우주공간을 날아 거의 수직방향에서 초음속으로 낙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영국군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고 합니다.

 
  이 V-2호의 길이는 약 14m, 몸통지름은 1.65m, 지름은 3.55m, 무게는 12,900kg, 폭탄 탑재량은 350~1,000kg, 로켓의 추력은 25,000kg, 연소시간 65초, 최대속도는 마하 4.5, 상승고도는 80~90km, 비행거리는 320km 이었습니다.

  그리고 발사방법이 아주 간단해서 차로 운반하여 적당한 장소에다 내려놓고, 테이블 모양의 간단한 발사대를 땅에다 세워 놓고, 지면이 무른 곳에서는 액체산소를 뿌려 얼려가며 사용했다고 합니다.
  발사장소를 이리저리 옮긴 것은 영국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 때 당시로서는 정말 무시무시한 아주 큰 로켓 폭탄이었습니다. 지하공장에서 월 300대 규모로 생산되었는데 1944년 말까지 모두 6,900대가 생산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히틀러(1889~1945년)의 욕심은 V-2호에 그치지 않고, 이를 더욱 크게 개량하여 태평양 건더 미국까지를 공격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메리카 로켓'이라는 것이었는데, 2단 로켓으로서 길이가 26m, 지름이 3.6m, 제 1단 추력 180톤, 연소시간 50초, 제2단 추력 30톤, 최종속도 초속 3,000m, 도달고도 340km, 사정거리 5,500km 이였다고 합니다.
  히틀러는 이 로켓에다 당시 개발 중이던 원자폭탄을 달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아메리카 로켓은 현재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 (ICBM; 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의 원조라고 해야 될 것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우주로켓 개발의 선구자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무렵, 미국에서는 고더드가 액체연료 로켓을 실험.연구 발사하는 정도였지만 당시 독일에서는 로켓과 우주비행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습니다. 그 중에서 유명한 사람이 헬만 오베르트와 호만, 폰 브라운 등이었습니다. 

(1) 헬만 오베르트 : 우주비행협회 설립
 

  1894년 트란실바니아(지금은 루마니아에 속하는 지역)에서 출생, 뮌헨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는데, 물리학과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후방에서 위생병으로 종사하였으며, 종전 후 대학에서 물리학을 더 공부하고 고등학교 선생이 되고, 30살 때 '로켓을 이용해서 행성으로' 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지는 덕분에 대학교수 자격을 따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베르트는 이미 15세(1909년)때 고체 연료를 이용하는 유인 다단로켓을 설계했고, 18세 때에는 액체수소와 액체산소를 추진체로 사용하는 우주비행체에 관한 기본설계도 했었다고 합니다. 또 23세 때는 제어장치가 붙은 장거리 액체추진 로켓무기를 개발하였다고 군 당국에 건의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 후 1944년에 독일이 개발한 V-2호 보다 더 규모가 큰 것이었지만, 군 당국에서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기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베르트는 자기가 쓴 책의 내용대로 액체추진 로켓에 관한 연구에 계속 몰두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젊은 과학기술자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켜 33살 때인 1927년에 '우주비행협회'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우주비행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던 젊은 과학기술자들이 이 협회에 가입했는데, 회원수가 모두 1,000명 정도나 되었다고 합니다. 오베르트의 아이디어를 실현시킨 유명한 '호만'과 '폰 브라운' 박사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우주 비행협회 회원들은 서로 도와가며 우주로켓에 관한 실험연구를 했는데, 1931년에는 액체추진 로켓 HW-1을 개발하여 2km 상공까지 쏘아 올리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럽 최초의 액체연료 로켓이었습니다.

(2) 호만과 폰 브라운 : 이론과 실제적인 연구로 V-2호 개발

  원래 도시계획 기사였던 호만(1880~1945년)은 1925년에 '천체의 접근 가능성'이라는 책을 써 냈습니다. 이 책에서 호만은 우주비행에 관한 여러 가지 이론적인 문제와 실제 기술적인 문제를 보다 깊이 다루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우주비행을 최소한의 에너지로 원 궤도에 진입시킬 수 있는 방법, 즉 '호만궤도(Hohmann Orbit)'에 관한 연구 내용이 유명한 것입니다. 오늘날 인공위성을 궤도에 진입시키는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죠.
  이 호만궤도 이론에 의하면 지구에서 금성까지 가는 데는 146일, 화성까지는 259일, 목성까지는 2.7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또 그는 1929년에 '우주비행의 문제'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오베르트가 제안했던 우주정거장의 개념을 확대시켜 우주정거장의 건설과 우주공간에서의 생활환경 문제에 대해서까지, 공학적인 측면에서 깊은 연구를 하였습니다. 


(호만(Walter Hohmann)과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

  한편 폰 브라운(1912~1977년)은 1932년에 베를린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육군 병기창의 연구원이 되었습니다.
액체연료 로켓을 개발하는 일을 담당했는데, 1933년 수냉식 액체연료 로켓엔진의 지상실험에 성공하고, 1934년에 A-2란 로켓을 개발하여 2.4km 상공까지 올려 보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래서 독일 군 당국에서는 브라운에게 무제한의 많은 연구비를 지급하고 연구를 서두르게 하는 한편, 페네뭔데에다 우주센터를 건립하기로 하였습니다. 2년 이상 걸려서 1937년에 문을 연 이 우주센터에는 어마어마한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고 5,000명에 가까운 많은 연구진이 있었는데,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V-2호가 개발된 곳이었습니다.

  V-2호의 원형은 A-4란 로켓이었는데, 개발초기에는 1톤의 탄두를 280km 먼 거리까지 운반할 수 있는 성능과, 유럽철도 터널을 통과할 수 있는 크기라야 한다는 것이 군 당국의 요구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1942년에 완성된 A-4의 성능은 고도 85km, 사정거리는 190km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브라운은 아주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직접 비행기 조종도 하고 우주복을 입고 우주비행 훈련도 해가며 A-4 로켓을 개량하여 1944년 V-2 호를 완성시켜, 9월 6일 영국의 런던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독일이 전쟁에서 패하자 브라운은 몰래 100여명이나 되는 연구원들과 같이 미국에 투항하였는데, 이 때가 1945년 5월 3일 새벽이었습니다. 이 무렵 다른 일부 연구원들은 구소련으로 망명을 하였다고 합니다. 
미국으로 건너온 브라운 일행은 자기들을 전범자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미 육군의 로켓개발 사업에 협력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브라운 일행은 곧 뉴멕시코 주의 화이트샌즈 육군 로켓사업장으로 옮겨져, 본격적인 연구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브라운이 독일에다 비밀리에 감추어 두었던 연구 자료와 V-2호의 부분품들이 그해 5월 말 미국으로 이송되었는데, 16척의 화물선이 동원될 정도로 아주 많은 양이었다고 합니다. 

  그 후 브라운 일행은 독일에서 가족을 데려오고, 미국 시민권을 얻고, 우주개발 사업에 본격적으로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연구 성과는 구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 보다는 늦었지만 1958년 1월에 익스플로러 1호를 우주로 쏘아 올리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이 때부터 미국과 구소련의 우주개발 경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한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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